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우스 2세 (문단 편집) === 탁월한 내치 능력 === ||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e59a881512b3cb1810db2e4dec222276.jpg|width=100%]]|| || 356년, 로마로 입성하는 콘스탄티우스 2세. || [[콘스탄티누스 1세]]와는 달리 군사적으로는 영 자질이 없고, 성격적으로 예민하고 지나칠 정도로 의심 많고 영악한 면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는 대제 사망 당시 생존한 아들 중 그 재능이 평균 이상이었고, 황제에게 필수적인 몇 가지 능력에선 성실하고 명민했다. 심지어 그는 조직력이 뛰어났고 책임감도 대단했다. 이는 섹스투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의 증언에서 드러난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콘스탄티우스 2세 밑에서 제국 관료 생활을 시작해 율리아누스 시대에 원로원 의석을 받았고 율리아누스의 신임 아래 판노니아 세쿤다 총독을 지냈다. 이후 그는 테오도시우스 1세때인 389년 [[프라이펙투스 우르비]]까지 지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겪어본 황제들을 바로 곁에서 보면서 전문 행정관료의 관점에서, <황제 열전>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모신 콘스탄티우스 2세를 "명민했으며 책임감이 대단하고 성실했다"고 논평했다. 이런 평가처럼 콘스탄티우스 2세는 내치와 법률 집행에 관심을 두고 직접 관리할 정도로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히 챙긴 황제였다. 심지어 그는 관료들의 탐학을 막는 법률도 여러 차례 제정해 이를 철저히 관리했다. [[359년]]에는 로마 시에만 있었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특별시장(Praefectus Urbi)]][* 뜻만 보면 도시의 총독/관구장이라는 뜻이다. 다른 Praefectus(영어로 Prefect)는 속주 상위의 대관구장을 뜻하는데, 수도 로마는 일개 도시이지만 수도이니만큼 드넓은 관구와 동급 취급을 해서 이 용어를 쓴다. 이런 점은 도와 동급인 우리나라의 특별/광역시와 같다.][* 이 당시에는 원로원의 수장직을 겸했다.]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설치해 행정 효율성과 전문성을 향상시켰다. 또한 [[https://en.wikipedia.org/wiki/Byzantine Senate|Byzantine Senate(동로마 즉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속주의 일정 규모 이상의 도시마다 원로원이 시의회마냥 있었다.]을 로마 원로원과 동급으로 격상시키고 정원을 2000명으로 확 늘림으로써,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완전히 기존의 로마 시와 행정적, 법적으로 동급의 수도로 만들었다. 이 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트라키아]] 속주로부터 행정적으로 독립되어 있지는 않았던 점을 생각해보면, 그의 시대를 거치면서 노바 로마 내 정치, 행정, 사회 부분이 향상되고 훨씬 세밀해지게 된 것이다. 부황 [[콘스탄티누스 1세]]의 [[324년]]~[[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건설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점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사람 입장에서 아쉬운 면일 수도 있다. 그는 야전군 관리와 군인들 생활상에도 관심이 많았고, 이들을 확실히 장악하는 법도 잘 알았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황궁의 사치스런 생활을 즐겼던 동생 [[콘스탄스]]와는 달리 국경 지대 순행에 열의를 쏟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궁에 있던 시간은 의외로 얼마 되지 않았다. 때문에 콘스탄스와는 달리 야전군을 확고하게 장악하게 됐고, 재위 기간 내내 본인의 성격적 결함 등으로 반란이 터지는 가운데에서도 로마군의 신망을 크게 잃지 않았다. [[일리리아|일리리쿰]] 속주가 없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리스|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 속주까지]]''' 죄다 서방 제국에게 넘겨준 상태의 동방 제국을 가지고[* 즉 유럽에는 [[트라키아]]만 영유한 상태로] , 한창 다시 무시무시한 상승세를 타고 있었던 사산 왕조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는 대등한 승부를 벌인 것은 콘스탄티우스 2세의 조직력과 행정적인 수완 덕택이었다. 아미다를 잃은 것이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집중적으로 부각되는데, 콘스탄티우스 2세가 다스렸던 동방 제국은 역대 동서 로마 분할통치기 제국들 중 최약체[*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한 차례 크게 패배하고 난 다음 317년에 보전했던 영역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서의 동로마 제국은 동로마사 전체를 통틀은 개념이 아니라 로물루스 폐위 이전 기준이다.]였음을 유념해야 한다. 때문에 한참 전성기에 있었고 또 역대 가장 뛰어난 장군 황제를 보유했던 사산 왕조와 [[샤푸르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때문에 인생이 크게 꼬인 또 한명의 불운한 명군]는, 성장 동력만 낭비한 채 세월만 보내게 된다. 또한 야전 지휘관으로서 무능했다는 점과는 별개로 그의 군제 개혁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갈수록 강해지는 사산 왕조를 상대하고, 중앙군을 강화하려면 황제 직속의 야전군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프레센탈 야전군을 제1프레센탈군과 제2프레센탈군으로 증설 개편하여 2배로 늘린 것 역시 콘스탄티우스 2세 아래에서 결정된 노력의 결실이었다. 또한 그전까진 그저 말을 탄 보병에 불과했던 제국 기병들이 정말로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이 되기 시작한 게 그의 치하에서부터며, 기병의 비율을 대폭 늘린 것도 그의 조치다. 더 대단한 점은 콘스탄티우스 2세의 이 군 조직 개편이 이후로 무려 400년 넘는 기간동안 기본 틀을 유지하게 됐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